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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대로라면 오늘도 9시부터 18시까지 워크샵이지만 어제 하루 듣고서 지금의 내 영어로는 앉아있어 봐야 남는 게 없을 것이라는 걸 확실하게 느꼈다. 나중에 영어가 조금은 더 편해졌을 때 다시 오던가 그 분석들이 필요해졌을 때 비슷한 강의를 찾아 듣던가 해야 할 것 같다.


오늘도 Cell and molecular biology 수업에 들어가서 내내 졸다가 나왔다. 들리는 건 없고 잠은 부족해서 앉아있으면 잠만 계속 온다. 잘 모르는 개념의 강의에 교수님의 독특한 발음까지 더해져 더더욱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이 강의는 과제도 발표도 없어서 마음은 편하다. 한 학기 동안 총 6번의 시험이 있다는 게 유일한 문제점. 수업이 끝나고는 J형을 잠깐 만났다. 점심을 먹기 애매해 의대 건물 근처에 스무디킹이 있는 걸 확인하고 향했다. 한국에서도 종종 사 먹던 엔젤푸드를 골랐는데 와, 제일 작은 사이즈가 5달러가 넘는다. 이 정도 가격인 줄 알았으면 차라리 써브웨이를 먹는 게 나았을 뻔했다.


학과 건물로 돌아와서는 워크샵에 참석 중인 Saurabh 없이 실험을 준비해야 했다. 때마침 학과 공용 autoclave까지 고장이 난 상태라 학과의 중국인 교수님 연구실에 있는 autoclave 사용을 부탁드려야 했다. 평상시에 지나다닐 때마다 계속 스몰 톡 걸어주시고 늘 웃는 얼굴이시라 좋은 분인 줄 알았더니 막상 본인이 귀찮은 상황에 처하니 원래의 성격이 나오는 듯했다. 오전에 Saurabh과 사용 허락을 구하러 갔더니 '나는 너희를 못 믿는다' 길래 장난치는 줄 알았는데 진심이었다. 온라인에서 사용설명서를 찾아 숙지하고 찾아오라 하지를 않나, 작동이 끝나면 손대지 말고 본인을 반드시 부르라 하지를 않나. 누가 보면 정말 대단한 기기 사용하는 줄 알겠어. 미생물 실험에서 멸균을 위해 사용하는 기본 중에서도 기본, 시료 넣고 문 닫아 버튼만 누르면 되는 기기 하나 사용하게 해 주면서 온갖 생색, 더럽고 치사해서 다시는 안 쓰겠노라 다짐했다. autoclave 하나 쓰는데도 잔뜩 지쳐버렸다. 어쩔 수 없이 또 한국에서의 상황과 비교하며 무기력해져 버렸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고선 발걸음 하나 떼기 어려운 신생아가 된 기분이다.
랩마다, 학과마다 분위기가 다르고 실험에 있어 철학도 다르다지만 가끔은 기본에 충실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에서의 연구실과 비교하여 지금 내 연구실은 훨씬 다양한 실험을 시도하고 있지만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실험이 이루어질 때가 있다. 미생물을 다루는 만큼 한국에서는 첫째도 둘째도 위생과 멸균에 신경을 썼었다. Clean bench의 UV는 실험하는 중을 제외하곤 24시간 켜 두었었고 실험 전 후로 알코올 소독을 해왔으며 Spreader, tube 같은 물품들은 늘 일회용만 사용해왔다. 그런데 이곳은 실험 15분 전에 UV을 켜고 spreader는 다회용, tube는 class tube를 autoclave 해서 사용한다. 로마에 왔으니 로마 법을 따라야겠지만 아직까지는 늘 어디선가 오염이 발생할까 봐 찝찝하다.


오늘따라 유난히 영어가 안 들리고 말도 안 나오는 날이라 Saurabh과 실험에 대해서 스케줄을 잡고 과정을 숙지하는 내내 딴소리를 하고 못 알아듣는 순간의 연속이었다. 머릿속에 잔뜩 안개가 낀 것마냥 뭐하나 또렷하게 떠오르지도 명쾌하게 계산이 되지도 않았다. 요즘의 문제는 단어가 영어 뿐만이 아니라 한국어로도 기억이 나지를 않는다. 머릿 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를 입 밖으로 꺼낼 방법이 없다. 한국어로라도 떠올라야 검색이라도 해볼 텐데. 내 실험 도와주겠다고 지난 주말부터 늘 늦게 가고 본인이 더 많은 일을 하면서도 콧노래를 부르는 Saurabh에게 너무 미안하다. 제발 이 생활이 빨리 익숙해져서 나도 1인분, 아니 0.5인분이라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8시에 학과에서 나와 Saurabh과 헤어지며 저녁을 어떻게 하느냐 물었는데 Blossom kitchen에서 사간단다. 집에 먹을 것도 없고 가라앉은 기분 달랠 겸 뭐라도 맛있는 걸 먹고 싶었는데 잘됐다 싶어서 함께 향했다. 역시나 Saurabh의 도움으로 DoorDash에서 픽업 주문하고 첫 주문 40% 할인까지 받아 12달러에 Orange chicken rice와 Custard Bun을 겟! 양이 많아서 반만 먹고 남길까 했는데 넷플릭스 보면서 먹다 보니 그새 저걸 다 먹었다.
해야 할 건 많은데 뭐하나 손을 못 대겠다. 그냥 머릿속이 온통 복잡해서 조금이라도 생각을 써야 하는 일이라면 그냥 시도조차 하고 싶지 않다. 빨래를 해야 하는데 빨래도 못하겠고 식재료를 주문해야 하는데 어플을 켜고 싶지도 않다. 물은 떨어져 가는데 언제 또 물은 사 오나 귀찮은 일만 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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