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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도착하고서 내 하루하루 소중하게 기록으로 남겨놓겠다 그렇게 다짐을 하고 왔는데 소홀했다. 바쁘다는 핑계로 자꾸 우선순위에서 미루다 보니 중간 기록이 하나도 없다. 지난 일기로부터 오늘까지, 그 기록만 모아도 책 한 권은 나올 정도로 많은 일이 있었는데 더 많은 기억을 잃기 전에 하나하나 복원해 기록을 남겨야지.

 

우선 집.

첫째. 계약하는 그 순간부터 시끄러울 거라는 것은 예상하고 있었지만 도가 지나치게 시끄럽다. 개강하기 직전 목요일인 8월 18일 저녁부터 시작된 소음. 그래도 그날엔 자세히 귀를 기울여야만 들리던 소리가 토요일쯤 되니 온 집안을 울린다. 그래도 다행히 2시가 되면 1분도 늦지 않고 음악이 꺼진다. 요즘 2시 전에 잠드는 건 사치라... 아직까진 잠을 방해받을 정도는 아니다. 

 

둘째. 냄새. 무슨 냄새인지도 모르겠다. 맡아본 적 없는 향이라 어떻게 냄새를 빼야할 지도 모르겠다. 집에 입주한 지 2주가 다 되어가는데 온 집에 배어든 냄새는 처음에 들어오던 그때, 그 향 그대로 옅어지지 않고 남아있다. 집에 계속 있다 보면 냄새에 익숙해져서 냄새가 좀 나아졌나 착각하다가 밖에서 우연히 옷에서 풍겨오는 냄새를 맡았을 때, 우산을 폈을 때 우산 속에 배어든 냄새를 맡았을 때, 무엇보다 밖에 나갔다가 집에 들어오는 그 순간 몰려오는 냄새에 미칠 것 같다. 도대체 이 냄새를 어떻게 없애야 할까. 

 

셋째. 욕조 마개. 처음에 집에 들어와서 리포팅을 위해 곳곳을 살피는데 욕조 마개가 없었다. 사용 방법을 모르는 건가 싶었는데 같이 입주했던 다른 분 집에는 제대로 마개가 설치되어 있는 걸 보고 maintanance를 요청했었다. 한동안 잊고 있다가 일주일이 넘어도 소식이 없어 다시 말해야 하나 싶던 날, maintenance가 완료됐다는 메일이 와 있었다. 세입자의 어떠한 허락도 구하지 않고 마스터키로 열고 들어와 수리를 해놓고 가는 미국이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그렇게 중시하는 나라가 남의 집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온다. 아직 짐 정리가 다 끝나지 않아 온갖 물건이 사방 군데 돌아다니는 내 방을 보고 나갔다는 게 얼굴 화끈거리기도 하고 더러운 신발 신고 카펫 밟고 돌아다닌 것을 생각하면 짜증도 나고 그렇다. 

아직까지는 야자수가 낯설고 신기하다. J형이 떠올라 반가위 찍은 Department of Psychology

그제 개강을 하고나니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다 (나 그래도 벌써 개강 3일 차 학생이구나!). 아침에 집에서 나가는 그 순간부터 집에 다시 들어오는 그 순간까지 정신 차리기도 힘들고 들리지 않는 영어 듣겠다고 온 신경을 집중하느라 한 것 없이도 녹초가 된다. 개강은 주말쯤 한 주 정산 느낌으로 기록 하나 남겨야지. 여하튼, 개강 첫 주가 이렇게 힘들고 자괴감 가득한 순간이라는 걸 알지 못한 채 한국에서 7월 말쯤 8월 24-26일에 진행되는 워크샵을 신청해뒀었다. College of Medicine에서 주최하는 Proteomics, Metabolomics에 대한 실험방법과 분석방법을 알려주는 워크샵인데 수업도, 실험도 미뤄둘 수 없는 상황에서 징징대며 참석했다. 

 

워크샵 먹거리: 생각보다 독해 한잔 먹고 속쓰렸던 커피와 적당히 달아 좋았던 그릭 요거트

언제나처럼 영어는 어려워 워크샵을 통해서 남은 건 먹을 것 밖에 없다. 미국 와서 커피 먹기가 이렇게 힘들 줄 몰랐다. 어제는 7시에 수업을 마치고 집에 가는데 편두통이 너무 심하게 왔다. 수업 때 받은 스트레스가 원인인지 카페인 부족이 원인인 줄은 모르겠지만 일단 카페인이라도 먹어보려 했는데 스타벅스를 들르자니 이미 멀어졌고 집 근처에 있는 카페들은 다 문을 닫았다. 결국 포기하고 집에 돌아와 예전에 사다둔 콜드 브루를 한 컵 들이키는 것으로 해결했다. 얼른 인스턴트 원두를 사서 텀블러에 타서 다녀야겠다. 

 

여하튼, 먹을 게 귀하다 보니 어디서든 먹을 것만 보면 자꾸 욕심이 생긴다. 오늘도 워크샵에 가니 커피와 빵, 요거트가 준비되어 있었다. 커피가 어찌나 반갑던지 소리 지를 뻔했다. 시작부터 요거트 한통을 비우고 준비된 빵으로 점심을 때웠다. 점심시간으로 30분 주는 게 말이 돼? 베이글은 타이어보다 질겼지만 그래도 빵은 항상 옳다. 동생과 강릉에 놀러 가 있는 엄마에게 사진을 보내니 가난한 동양인 같아 보인다고 먹을 거 너무 밝히지 말란다. 그런데 틀린 말이 없는 걸? ㅋㅋ '핵' 가난한 동양인인데. 굶어 죽기 전에 얼른 H마트 주문을 해야 할 텐데 자꾸 우선순위에서 밀리다 보니 주문이 늦어진다. 그래. 자꾸 먹고사는 문제를 우선순위에서 뒤로 미루지 말자. 아침도 꼬박꼬박 챙겨 먹고 영양 생각하면서 골고루 요리해 먹자.

 

쏟아 넣고 끓이기만 한 레토르트 카레와 JMT 하프갤런 아이스크림

얼마 전 Publix Greenwise에서 고심 고심 끝에 (제일 싼 걸로) 사온 레토르트 인도식 카레에 닭가슴살과 당근을 조금 더 넣어 끓여 먹은 저녁. 냉장고에 있는 야채라곤 로메인 상추, 꼬마 당근뿐이라 뭘 해 먹고 싶어도 시도할 요리가 없다. 달걀과 닭가슴살도 얼마 안 남았는데 그래 진짜 오늘내일 내로 H마트 주문해야지. 일주일쯤 전 사 왔던 하프갤런 사이즈의 아이스크림. 초코맛이 먹고 싶었지만 Moose Tracks 저 맛이 유일하게 저지방 제품이라 저걸로 사 왔었다. 다행히 초코 마블링에 초코 알도 박혀있어 마음에 쏙 든다. 야금야금 조금씩 먹으려 했는데 출출할 때마다 스트레스받을 때마다 먹어댔더니 벌써 다 사라지고 없다. 건강 생각하면 안 먹는 게 맞는데 저런 소소한 즐거움이라도 남겨둬야 하는 건 아닌가 딜레마. 

 

그리면서 보여주는 건 외우라는 무언의 압박?

오늘 들은 전공 필수 과목의 수업. 참 특이하게 모든 대사과정을 하나하나 그리면서 설명해주신다. 칠판이나 패드에 하는 판서도 아니고 정말 종이와 펜을 들고오셔 그 종이를 프로젝터에 비추며 그리신다. 초등학교가 떠오른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OHP 필름에 인쇄된 자료를 프로젝터를 통해 비춰주면 그걸 보며 문제를 풀었는데 그 비슷한 기술을 2022년에 다시 보게 될 줄이야.

단백질 분석을 위해 젤에서 밴드를 분리하는 과정. 나는 하기 귀찮아서 여기저기 기웃기웃하며 남들 하는 거 구경하다가 전공 수업 들으러 나왔다. 말 없이 나가는 건 예의가 아닌 거 같아서 워크숍 진행하시는 교수님께 수업 참석을 해야 할 거 같다고 말씀드리니 수업이 더 중요하다면 가야 하지 않겠냐신다. 그럼요. 그 수업에 제 앞으로의 등록금이 달려있고 제 학과 생활이 달려 있는걸요.

 

올 초부터 이어져온 리뷰 논문의 작성이 마무리됐다.

끝나도 끝난 게 아닌 생활의 연속, 수업을 끝냈으니 이제 실험을 해야한다. 한창 실험 준비를 위해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는데 옆 연구실 Saiful이 수업은 괜찮냐고 물어온다. 이번 학기 4개의 수업을 듣는데 Saiful과는 2개의 수업, Frank와도 2개의 수업, Saurabh과 1개의 수업이 겹쳐 결과적으로 혼자 듣는 수업은 없다. 알아듣는 게 없다고 징징대니 본인도 첫 학기에 정말 힘들었어서 무슨 느낌인지 안다고 모르는 거, 궁금한 거 있으면 언제든 물어보라고 한다. 먼저 말하지 않았는데도 물어봐오고 도움 주겠다는 그 말이 어찌나 고맙던지. 역시 유학생 마음은 유학생이 안다. 나도 7년쯤 유학 생활하면 Saiful처럼 이곳의 사람들과 문화에 어떤 이질적인 느낌도 없이 섞여서 어울릴 수 있는 걸까. 

 

실험까지 끝내고 돌아오면 저녁, 그리고 저녁 이후의 삶은 다시 연구실 일. 녹음해온 수업들 다시 들으며 복습(?)해야하는데 들을 시간이 없다. 주말만 기다리는 중. 주말엔 밀린 집안일도, 수업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 있기를. 

 

 

+ 미국에서의 하루는 매일매일이 새로운 일의 연속이고 그 속에서 수 많은 스트레스와 충격을 받으며 온몸으로 적응해나가고 있다. 요 며칠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쳐 집에 도착하고 이번 학기, 그리고 박사과정을 정말 잘 해낼 수 있는 건지 온 머릿속이 물음표로 가득했다. 그러다가 문뜩 든 생각.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산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항상 우물 안 개구리로 살지 않기 위해서, 조금이라도 내가 속한 범위와 한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나름의 노력을 해왔다. 결과가 늘 성공적인 건 아니었지만 괴로웠던 영어 시험 준비도, 대학원 지원과 인터뷰도 결국엔 이겨내 원하던대로 미국 땅을 밟았다. 안주는 늘 안정적으로 느껴지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편한 선택은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기에 늘 발전을 위한 괴로운 시간 속에서 포기는 포근하고 달콤하게 느껴졌다. 지금 내가 느끼는 한국에서의 삶과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은 어떻게보면 포기의 달콤함과 상응하지 않을까.

 

지금의 내 혼란도 언젠간 지나갈 일들이고 나중에 생각하면 힘들었지만 잘 마무리했던, 한 단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이었던 시간으로 남을 게 분명하다. 28년 인생에서 얻은 확실한 진리는 쉽게 얻어지는 값진 결과는 없다는 것과 지금 내가 불안정하고 힘들다는 건 내가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중이기에 그렇다는 것. 의연해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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