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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이 끝나도록 기분은 바닥을 쳤다. 복합적으로 좌절감은 커져만 가는 상황에서 며칠 동안 말할 사람 없이 입을 닫고 지내다 보니 외로움은 점점 커져만가고 자꾸 한국에서의 추억들, 사람들이 떠올랐다. 그래도 자기 직전 유튜브에서 찾아본 미국에서의 정착, 유학생활에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의 영상이 많은 위로가 됐다. 나만 힘든 건 아니구나, 많은 사람들이 초기에 어려움을 겪는구나, 위안이 됐다. 도착한 당일 혹은 도착한 지 일주일 만에 눈물을 보이는 사람들을 보며 같은 어려움을 공유하고 있다는 생각에, 나만 개복치라 힘든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리고 오늘, 생각보다 모든 일이 수월하게 풀렸고 정해진 대로 흘러갔다. 내가 원하는 대로 무언가를 잘 마무리했다는 그 성취감이 기분을 들뜨게 만들었고 무너져 내린 자존감을 어느 정도 회복시켜줬다. 미국에서 계좌를 만드는 일도, SSN을 신청하기 위해 학과를 통해 서류 작업을 하는 일도 누군가에겐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일이겠지만 내게는 많은 용기를 요했고 그 일이 잘 마무리됐을 때 성취감은 생각보다 컸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아예 첫 발부터 새롭게 디딘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기로 다짐했다. 한국에서 내가 어떤 사람이었고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로 지금의 나를 평가하기보다는 미국에서 새롭게 모든 것을 시작하는 새내기로써 내 자신을 인정하고 실패에 주눅 들지 않고 성공에 후하게 칭찬하기로 다짐했다.
은행 예약은 오늘 아침 10시로 잡혀있었고 생각보다 늦어진 준비에 부랴부랴 은행으로 향했다. 은행에 도착하자마자 어떤 일로 방문했냐는 직원의 물음에 10시로 예약이 잡혀있다고 답하니 본인이 내 업무를 담당할 직원이라며 오피스로 안내했다. 그렇게 Joshua와의 은행 업무 시작. 물론 빠른 말, 특유의 말투 때문에 Joshua의 말 전부를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본격적으로 '추론 영어' 감각을 총동원하여 일처리를 생각보다 매끄럽게 해 나갈 수 있었다. Awsome을 끝없이 연발하는 Joshua 덕분에 기분 좋게 모든 과정을 처리할 수 있었고 계획하던 대로 계좌도, 체크카드도 만들 수 있었고 디지털 카드 등록부터 온라인 뱅킹까지 모든 과정을 파악할 수 있었다. 애플 페이를 처음 써봐 어떻게 쓰는 것인지 물어보니 ATM기기까지 손수 데리고 가서 시범을 보여줬다. 모든 작업을 마치고 문 앞까지 마중도 나와준 서윗가이.
잘 마무리된 은행업무로 한껏 기분이 좋아진 채로 연구실로 향했다. 원래 오늘 Welcome Lunch를 연구실원 다 같이 하기로 했었는데 다들 실험 스케줄 문제로 시간을 맞추기 어려워 점심 식사는 수요일로 밀리게 됐다. Saurabh와 Frank의 도움을 받아 이번 학기 무슨 수업을 들으면 좋을지 추천을 받고 잠시 들른 교수님까지 함께 서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는 수요일에 다시 오겠다 인사를 나누고 밖으로 나왔다. 각자 점심을 싸온 상태라 원한다면 Break room에서 음식을 사 와 함께 먹자는데 굳이 그들만의 루틴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곧 나도 저 루틴 속으로 들어갈 예정이고 무엇보다 이 더운 날 밥 함께 먹자고 음식을 사 오고 몇 십분 앉아있다가 떠날 만큼의 열정이 없었다. ㅎ


그리하여 갑작스럽게 만든 J형과의 점심 약속. 원래는 오후 늦게 커피 한잔 하기로 했었는데 점심 약속이 파토나는 바람에 혹시 점심을 함께할 수 있을지 형에게 연락했다. 마침 형도 학교 안 가게 대부분이 문을 닫은 탓에 점심을 못 먹은 상태라 점심 듀오 결성! 학교 주변, 아니 미국에 와서 아직 한 번도 식당에 가본 적이 없는 탓에 어딜 가야 할지가 문제였다. 그나마 만만한 게 중국음식이겠다 싶어서 미리 눈여겨보았던 Blossom Kitchen으로 향했다. 음식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고 오랜만에 누군가와 앉아 한국어로 대화를 나눌 수 있어 행복했던 시간. 영수증에 팁을 써보는 것도, 애플 페이를 쓰는 것도 처음이라 어리버리 난리도 아니었는데 누군가 옆에서 똑같이 어리버리하게 함께하는 상황이 묘하게 마음이 놓였다. 혼자서 어리버리 할 때보다 덜 긴장되고 덜 민망한 느낌, 뭔가 누군가와 함께 있었더라면 내가 자괴감을 느꼈던 모든 순간들을 별생각 없이 흘려보낼 수도 있었겠구나 싶었던 순간. 한참을 영어가 해도 해도 너무 안 들린다, 교수님 준비 없이 만나 영어 때문에 멘탈이 털렸다와 같은 푸념을 서로 잔뜩 늘어놓다가 형은 학과 건물로, 나는 바로 옆 스타벅스로 흩어졌다.


원래 계획은 스타벅스에서 SSN 신청을 위한 서류 처리를 진행하고 연구실 일도 하려 했는데... 학과 사무실에서 보내온 메일을 다시 읽어보니 서류를 직접 수령해 CGE에 방문하고 서명을 받아 추후 절차를 진행하라는 것이었다. 최대한 빨리 완료해야 먹고 살 돈을 차질 없이 받을 수 있는 과정인지라 커피를 받아 든 지 40분여 만에 스타벅스에서 나왔다. 의미 없게 써버린 나의 4.78$. 그래도 나오기 직전 한 테이블에서 아주머니 두 분이 한국말로 대화하시는 걸 듣곤 마음이 편안해졌다. 일주일간 동양인 보기도 힘들었는데 그래도 여기 어딘가에서 한국인도 살아가고 있다는 게 위안으로 다가오는 순간.
이후 학과 사무실에서 Victoria와의 일처리도 매끄럽게 완료됐다. Victoria의 실수로 서류상의 내 이름이 잘못 적혀있었고 지도교수님께 수정된 서류에 다시 서명을 요청하는 동안 Victoria가 허락해준 대로 학과 사무실 내 커피도 마음대로 내려먹고 필요한 서류도 뽑으며 시간을 보냈다. 정말 감사하게도 학과 사무실 내 모든 직원분들이 친절해 편안하게 일처리하고 소통할 수 있었다. 연신 미안하다는 Victoria에게 서류를 받아 들고 CGE에 방문해 서명을 받는 걸로 SSN 신청을 위한 서류 준비까지 완료.

하루가 흘러가는 동안, 목요일에 이사 들어갈 아파트에 전기 연결 요청도 문제없이 잘 마무리됐고 동물 사육장 출입을 위한 신청도 잘 접수됐다. 생각보다 많은 것을 준비해야 하고 많은 일을 신경 써야 하지만 하나씩 차근차근 잘해나가고 있는 거 같아서, 생각보다 많은 것을 잘 해낸 오늘이라 뿌듯하다. 앞으로의 하루하루도 오늘만 같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드디어 연구실 단톡방을 나왔다. 교수님이 계신 단톡방에까지 인사를 하고 나오는데 여러모로 시원섭섭하다. 이제 진짜 한국에서의 모든 일이 정리됐다는 게 개운하기보다는 마지막 잡고 있던 끈까지 놓친 느낌이라 서운하다. 너무 오래 몸담고 있던 연구실이라 그런 걸까, 끝이라고 생각하니 연구실에서의 추억들만 계속해서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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