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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출국 D-20 싱숭생숭

Ian Park 2022. 7. 13. 03:39

오늘 엄마, 이모, 이모부와 함께 다녀온 양주 오랑주리 카페. 기대없이 가서는 식물원 같은 내부에 행복했다.

 

1. 출국 D-20

출국일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20일이 남았으니 뭔가 차근차근 준비가 진행되고 계획이 잡혀있어야 할 타이밍인데 아직까지 어떤 것도 준비된 것이 없다. 날 잡아 리스트를 만들어두고 하나씩 완료해나가고 싶은데 그 '날'이 잡히지를 않는다. 출국 전까지 연구실을 매주 월, 수, 금마다 나가려 했는데 내일은 가지 말고 본격적으로 출국 때 뭐가 필요할지 고민해봐야 할 것 같다. 마침 비도 많이 온다고 하니 느지막하게 아점 먹고 카페에서 고민해봐야지. Y와 마지막으로 서울에서 호캉스 (용산에서 꼭 먹어보고 싶은 크림 돈가스가 목적의 8할)를 한 번 더 하기로 했는데 그 호텔도 내일 알아봐야지.

 

2. 갉아먹히는 중, 내 탓일까?

요 며칠, 아니지 사실 거의 몇 달간 미국 연구실 관련된 일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결론적으로 내 경력에도, 앞으로의 박사 생활에서도 도움이 될 경험이겠지만 이 일들 때문에 놓친 것들과 가지지 못한 시간들이 너무 많다. 일단 지난 4월에서 6월까지 하동에서의 한달살이, 제주에서의 한달살이 그 시간동안 마음 편히 쉬지를 못했다. 이왕 한달살이를 하고 있으니 뭐라도 하며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강박과 정해진 시간 안에 일을 끝마쳐 보고해야 한다는 압박에 마음은 늘 소란했고 스트레스는 점차 쌓여갔다. 두 달을 그렇게 긴장 상태에서 보내고 나니 제주에서의 마지막 일주일은 몸이 너무 무겁고 피곤해 집 밖으로 거의 나가지도 못했다. 1층 식탁에 앉아서도, 2층 침대에 누워서도, 3층 욕조에 몸을 담그고서도 바다를 볼 수 있었던 그 호사스럽던 공간에서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갈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차라리 집에 돌아가면 어디를 나가야 한다는 강박 없이 그저 일만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인생에 다시 얻기 어려울 젊은 날, 제주에서의 한 달을 그렇게 허비했다. 결국 꿈꾸던 어떤 일도 시작도 하지 못하고 두 달은 지나갔다. 여행 수필도, 엽서 그림도, 미안해 나의 마지막 20대.

 

그리고 지금, 지난 3월부터 작업해오던 리뷰 논문은 1차 초안의 작성이 완료됐다. 그 사이 2저자였던 한국 연구실 동료 M이 바쁜 업무 때문에 함께하지 못하게 되고 미국 RN 교수님의 새로운 학생 Teresa와 Christin이 저자로 함께하게 되었다. 아직 교수님 컨펌 전이지만 앓던 이가 빠져도 이보다는 덜 후련할 것 같다. 다만, 6월 초 RN 교수님이 맡긴 분석이 있는데 사실 차일피일 미뤘다. 리뷰 논문 신경 쓰는 것만으로 벅찬 것도 있었고 처음 해보는 분석이라 분석의 pipeline을 파악하는 것도, 프로그램을 운용하는 법을 익히는 시간도 필요했다. 6월 말까지 미뤄두고 있다가 진행상황을 물어오는 교수님의 메시지에 정신을 차리고 기한을 물어봤는데 7월 14-15일 학회에서의 발표 때 필요한 자료란다. 그날부터 새벽까지 잠못이루며 pipeline을 확인하고 test set을 돌려가며 분석 프로토콜을 적립했는데 워낙 높은 computing power을 요구하는 분석들이라 샘플마다 기본적으로 몇 시간이 소요됐다. 아무리 각을 재봐도 14일 전에 결과를 얻는 건 무리라 구구절절 교수님께 사과 메일을 써서 보냈다. 보내고 나니 몰려오는 자괴감. 벌써 몇 번째 보내는 사과 이메일인지, 미국을 가지도 않은 이 시점에 나는 싸야 할 짐에 손도 대지 못하고 분석에만 몰두하고 있는 게 맞는 건지. 한국에서 남은 시간 동안 가족들과도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친구들과도 인사를 나눌 시간이 필요한데 마음은 갉아먹힐 대로 먹혀 남은 마음이 없다. 카톡들에 답장할 심적 여유도 남아 있지를 않다. 평생을 일과 삶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찾지 못하는 내 탓일까, 자꾸 균형을 깨트려오는 주변의 상황 탓일까. 이러다가 정말 균형을 영영 잃고 잠식당할 것 같아, 내일 하루는 교수님에게 어떤 답장이 오건, 어떤 요청이 오건 신경 쓰지 말고 지금 내게 필요한 일과 주변 사람들에게 신경 쓰며 하루를 보내야지. 

 

3. 벌써 그립다

출국도 안했는데 주변 사람들과 출국 전 마지막 모임을 가지는 것만으로도, 출국을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벌써 그립고 괜히 마음이 몽글해진다. 평생을 나는 혼자가 더 편한 사람,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보다 혼자 있을 때 에너지를 얻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되돌이켜보니 나는 혼자였던 적이 없다. 혼자였던 적이 없어서 정말 혼자 남았을 때의 시간들에 대해서 무지했던 것 같다. 평생을 가족들과 함께 살아왔고 몇 년간 연구실에서 살다시피 하며 연구실 동료들과 수많은 추억을 쌓으며 생활해 왔다. 어느 집단에서든 마음에 맞는 두 세명의 사람들과 함께 짧게는 몇 년 길게는 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얼굴을 보고 살아왔다. 그 사람들과 앞으로 적어도 몇 년은 떨어져서 지내게 될 거라고 생각하니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이 울적해진다. 당장 오늘도 두 단톡방에서 오가는 내용들 때문에 뭉클함이 한껏 배가됐다. 

 

함께 군생활 했던 J. 벌써 8년차 친구.

군대에서 내가 너무 좋아했던 후임 J. 11개월 차이나는 군 생활 때문에 내가 한참 먼저 전역했는데 J가 휴가 나와서 만나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었을 정도. 그냥 J와 하는 대화는 모든 게 너무 재미있었다. 비슷한 성격, 비슷한 관심사, 특히 여행 이야기는 한 번 시작하면 끝도 없이 이어졌다. 맡후임이었던 J형까지 트리오로 정말 많이 붙어 다녔다. 서로 다른 분야에서 바쁘게 살아가는 탓에 많은 여행을 기획하지는 못했지만 함께 대만 여행을 시작으로 중국, 제주도, 군산에서 추억을 쌓았다. 우연히 인스타 스토리에서 군산 여행이 벌써 2년 전임을 확인하고 단톡방에서 이를 상기하던 중 J의 말. 맞아. 아직 출국도 안 했는데 나도 다들 그립다. 일주일 전에 다 같이 얼굴 봤으면서 또 그립다. 최근 기력이 없다 했더니 카톡을 할 때마다 한약을 지어먹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J. 그 진심 어린 걱정이 참 고맙다. 

 

대학 동기 M과 S. 이 둘은 이제 10년차.

느닷없이 툭, 20일 남았다는 S. 이 사람들도 대학다니는 내내 서로 다른 수업을 듣는 순간을 제외하곤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참 많이 붙어 다녔다. 거의 일심동체처럼 누군가 하는 건 다 같이 따라 했다. 약속이나 한 듯 셋 다 복수전공을 선택했고 학점 따겠다고 정말 열심히 공부했고 공모전도, 대외활동도 늘 한 팀으로 나갔다. 군대도 사실 S가 간다고 하니 나도 따라 넣었다가 덜컥 붙는 바람에 가게 됐었다. 학부 졸업 때도, 석사 졸업 때도 늘 함께해주었고 연구실까지 찾아와 생일 케이크를 불어주던 사람들. 가끔 그 모든 기억을 잊고 사소한 행동에 날을 세울 때가 있는데 주의해야지. 늘 날카롭고 예민한 나한테 맞춰주던 M과 S. 이 둘도 많이 보고 싶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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