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일상

걸을 수 있어서 행복했던 날

Ian Park 2022. 3. 23. 01:11

일주일에 한 번씩 연구실을 나가는 생활이 시작된 지 어느덧 한 달 가까이 되어가고 있다. 평일에 이렇게 오랜 기간 집에 있어보는 건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가 마지막이었으니 9년 만이다. 여유로 가득한 나날일 줄 알았는데 미국 대학원 일과 한국 대학원에서의 일을 동시에 처리하려다 보니 생각보다 마음은 늘 무겁고 마음 편하게 하루 보내기가 여간 까다롭다. 그럼에도 평일, 햇빛이 가득한 시간대에 잠깐이라도 밖을 산책하고 카페에 앉아있을 수 있다는 건 다시없을 소중한 시간이자 호사다. 오늘도 점심을 먹고 드라마를 보며 세월아 네월아 빨래를 개고 널다가 다음 날 있을 RN 교수님과의 면담을 준비하기 위해 부랴부랴 씻고 짐을 싸서 카페로 향했다. 

 

바지도, 후드티도 오버사이즈. 그저 털털하게 편안하게 입을 수 있는, 푸릇푸릇 잡초가 돋아나는 봄의 흙바닥과 물아일체 룩.

 

카페는 몇 달 전부터 걸어서 50분쯤 걸리는 옆 동네로 간다. 걷는 걸 좋아해서 멀리까지 걸어가는 것도 있지만 걷는 동안에는 일이든, 공부든 하지 않아도 된다는 그 해방감이 좋다. 50분 동안 걸으면서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날씨를 온몸으로 느끼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이어가는 그 시간이 좋다. 몇 달을 같은 물길을 따라 걷다 보니 이 길에서 소모했던 감정도 털어낸 걱정도 참 많다. TOEFL 시험을 준비하면서 카페에서 집에 돌아가는 길, 애써 외운 writing/speaking 스크립트가 기억나지 않아 가로등 불빛에 책을 비춰보며 화가 나 울었던 적도 있었고, 작년 10월 갑작스러운 파동 하나 때문에 자아가 통째로 흔들리고 자존감이 바닥을 치던 시기엔 괜찮아질 거라고 이 길 위에서 수도 없이 나 자신을 위로하고 마음을 다잡았었다. 그때의 일기를 보고 있자면 나는 내가 반복적으로 겪는 혼란과 파동은 평생에 걸쳐 반복될 것이고 면역 없이 견뎌내야겠지만 그럼에도 항상 그 끝은 있다는 것, 주변을 단단하게 만들었을 때 정상궤도로 더 빨리 돌아올 수 있음을 깨달았다. 가끔은 길 위에서의 사색이 감정과 기분을 구렁텅이로 이끌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복잡한 내 내면의 얽히고설킨 생각들을 풀어내는데 참 유용했다. 

 

집에서 산책 삼아 카페까지 가는 길. 편도 40-50분쯤 걸리는 이 길에서 몇 달 동안 참 많은 생각을 했었다.

 

오늘의 내 내면은 시작부터 고요했고 또 긍정적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모든 게 쏙 마음에 드는 하루였다. 편안하게 입은 옷 덕분에 가벼운 몸, 선선한 날씨에 은은하게 비치는 햇빛, 이따금씩 불어오는 바람에 적당하게 날리는 앞머리, 귓속에서 울려 퍼지는 희망찬 드라마 OST까지(요즘 이태원 클라쓰를 정주행 하기 시작했는데 OST를 듣고 있자면 비장하게 나만의 무언가를 찾아 여정을 떠나고 있는 느낌이 든다) 기분은 한껏 들떴다. 그렇게 걷고 있는데 문득 이렇게 걷고 있어서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걷고 있으니 느껴지는 모든 주변의 생기들, 잊고 있었던 봄과 가을에 걸을 때만 느낄 수 있는 적당한 온도에서 느껴지는 포근함이 다시금 떠오르며 걷기 좋은 계절이 왔음을 느낀다. 걷는다는 게 내게는 몇 없는 취미이자 기분전환을 위한 비책인지라 나이가 들더라도 걷는 능력만큼은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 

 

새로 발견한 카페에서의 3,900원 라떼. 비싸지 않은 가격에 푸짐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좋았던 옆 동네에서의 커피.

 

햇빛이 좋은 날이라 놓치기 아쉬워 평소 가던 카페 말고 지도와 후기를 한참 뒤져 햇빛이 가득 드는 카페를 찾아갔다. 결과는 대성공. 세 시간쯤 앉아 일하다가 나온 거 같은데 그 세 시간 동안 햇빛을 정면으로 받다 보니 나중에는 너무 더워 부채질을 해야 할 정도였다. 생각했던 분량의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미국 대학원 지원 때 추천서를 써주셨던 황 교수님께 전화가 왔다. 코로나 때문에 못 뵌 지 거의 2년 가까이 되어가던 터라 오랜만에 듣는 교수님의 목소리가 참 반가웠다. 학부 2학년 때, 복수 전공을 하면서 만나 뵙게 된 이후로 석사를 졸업할 때까지 교수님께 참 많은 경제적 지원과 진로에 대한 조언을 받았다. 격의 없이, 솔직하게 대해 주시는 덕분에 지도 교수님보다도 더 편안했고 또 고민 없이 매번 연락드릴 수 있었다. 미국 대학원 진학을 축하하면서도 본인의 분야로 나를 끌어들이는 데 성공하지 못함이 못내 아쉽다는 교수님의 농담도 참 감사했다. 간단하게 근황을 전하다가 다음 주로 식사 약속을 잡았고 오랜만에 만나 뵙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생각에 오는 내내 기분은 더 들떴다. 오랜만에 별 걱정 없이 기분 좋았던 기억들로만 하루 마무리 성공.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햇빛을 핑계삼아 계속 걷기  (0) 2022.03.28
쏘카의 교훈  (0) 2022.03.27
주문진, 일출 없는 일출 여행  (0) 2021.05.08
화요일, 연남동  (0) 2021.04.29
좋아하는 글  (0) 2021.04.26
댓글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