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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초였던가. 고등학교 친구들을 동네에서 만났다. 언제 친해졌는지도,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지도 서로 물음표만 가득한 사이인 12년 차 친구들. 소쿠리 안 잡곡을 둥글게 흔들어대면 비슷한 크기의 잡곡끼리 모여드는 것처럼 3년간의 고등학교 생활 동안 하나 둘 모여들어 넷이 되었다. 비슷한데 또 너무 다른 넷이다보니 서로 사는 모습도 제각각, 사는 방법도 제각각인지라 일년에 한두번 보는 것도 힘들다. 이번 모임도 시간 맞추기 힘들고 코로나 때문에 미루고 하다 보니 거의 1년 반 만에 한자리에 모였다. 예의가 있는 사이의, 아직은 다소 어색한 누군가를 오랜만에 만날 때 그 오랜만이라는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어느정도 기쁨을 내비쳐야할지 가는 내내 고민하게 되는데 오래된 사이의 누군가에게는 시간의 부채감도, 표현도 필요가 없다. 언제 봐도 고등학생 시절의 그때 그 모습 같아서 어제 본 것처럼 선명하고 무덤덤하다. 그래서인지 한참을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 문뜩 근황을 묻게 되고, 그제야 못 본 사이 꽤 많은 시간이 흘렀음을 깨닫는다.

새로 생긴 카레집에서 소소하게 카레밥을 먹고 S가 추천한 그 옆 카페에서 다쿠아즈에 커피를 시켜두고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가 언제 한번 여행 가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늘 그렇듯 여행은 언제든 거절하지 않는 본능에 충실해 최대한 빨리 떠나자고 다짐했고 J가 새로운 직장에 출근하는 5월 첫 주 전에 떠나기로 했다. 구구절절한 사연으로 아직 4학년에 재학 중이고 심지어 시험 기간인 S는 아쉽게도 다음을 기약했고 Y는 있던 약속을 취소(무슨 약속이었는지는 끝까지 말 안해주었지만)하고 함께하기로 했다. 이렇게 3명의 1박 2일 여행 메이트 완성.

나만 없는 운전면허, 운전 베테랑 J와 Y를 믿고 J의 차에 올라타 주문진으로 향했다. 조수석에 앉아있는데 기분이 참 이상하게 몽글거린다. 고등학교 때 시험 후 버스 타고 시내로 가서 피자 먹을 날을 함께 손꼽아 기다리고 야간자율학습시간에 몰래 빠져나가 편의점에서 라면을 먹고 들어오는 소소한 즐거움을 공유하던 친구가 이젠 내 옆에서 내비게이션을 보면서 운전을 하고 있고 나는 조수석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너무 어른이 되어버린 거 같아서 자랑스럽기도 하고 뭉클하기도 하고 심경이 복잡하다. 20살이면 어른이 될 줄 알았는데 28살이 된 지금도 어른이 못된 것 같다. 아직 어른이 되기까지는 한참 남은 거 같은데 어른만 할 수 있는 운전을 친구가 하고 있는 걸 보니 그 모습이 내심 어색했던 거 같다. 나도 운전을 하게 되면 조금 더 어른이 되는 걸까?
자정이 좀 넘어서 주문진에 도착했고 잠깐의 산책 후에 곧바로 준비해온 음식과 와인을 곁들여 온갖 이야기를 쏟아냈다. 서로 조금씩 알고 있었던 고등학교 동창들의 단편적인 이야기들을 짜 맞추어 가기도 하고 기억 저편에 숨어있던 추억을 꺼내들기도 하며 과거와 현재를 수도 없이 넘나들었다. J는 원래 술을 안 좋아하고 Y는 맥주를 좋아하다 보니 와인은 거의 내 차지가 되었다. 반병쯤 마셨을 때, 이미 취기가 상당히 올라 기분이 좋다고 계속 중얼거리고 있던 와중에 군대 이야기가 나오자 신이 났다. 급양병으로서 통조림을 어떻게 깠었는지 제대로 보여주겠다며 과장되게 손을 휘젓다가 와인잔을 날려버렸고 순식간에 친구의 흰옷, 내 흰 바지, 흰 테이블과 흰 벽지에 와인이 흩뿌려졌다. 화를 낼 만도 한 상황인데 정말 몇 분간 셋이서 미친 듯이 웃었다. 얼굴까지 빈틈없이 와인이 튀어있는 친구의 모습도 웃겼고 덩그러니 엎어져있는 죄 없는 와인잔도 웃겼다. 오랜만에 격의 없이 터져 나오는 웃음들이 못내 반가웠고 또 기억해두고 싶어서 그런 친구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웃고 싶을 때마다 열어 봐야지.


다음날부턴 하루 종일 흐리고 잊을만하면 비가 내렸는데 구름 가득한 흐린 바다는 처음이었던 거 같다. 맑지 않아서 일출도 못 보고 (덕분에 마음 편히 꿀잠을 잤다. 사실 난 일출에는 별 관심이 없었는지도) 시퍼런 바다도 볼 수 없었지만 우중충하고 묵직한, 그래서 위압감 있는 바다도 생각보다 매력 있었다. 다 같이 편하게 보고 싶어 졸음쉼터에 차를 세웠다. 흩날리는 가랑비에 밀려드는 비 내음과 바다 내음 그리고 자갈에 부서지는 파도 소리, 오감이 바쁘다. 물은 언제나처럼 무섭지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면 가만있어도 지루하지 않다. 여전히 머릿속에서 잡념들은 저마다 아우성이지만 몰려드는 파도와 자극들에 잡념도 조금씩 쓸려나가는 기분이랄까.


설악산은 아예 생각지도 못했다. 눈앞에 보이는 산들이 설악산일 거라 생각도 못 했다는 게 맞는 표현일 거 같다. 점심으로 물회를 먹고 나오는 길에 저 멀리 안갯속에 파묻혀 있는 산의 모습이 멋져서 감탄하고 있는데 J가 근처에 설악산 케이블카가 운영 중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날이 썩 좋지 않아 운행을 안 하려나 했는데 홈페이지를 확인해보니 마침 정상 운영 중이다. 별다른 일정도 없던 터라 일단 가보기로 했다. 그때 우리의 즉흥 결정, 아주 칭찬한다.
케이블카를 타러 가던 길 바라본 풍경도 대단했는데 실제로 정상에 도착해서 본 풍경은 어마어마했다. 물론 예정에 없던 등반(그리 길지 않은 거리지만 운동과 담쌓은 나에겐 꽤나 먼 거리)을 해야 했고 불어대는 바람에 비가 사방 군데서 몰아쳐 우산을 쓴 의미가 없이 젖긴 했지만. 맑은 날이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긴 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이런 궂은 날씨에 안갯속에 파묻힌 산에 올라보는 경험이 더 희귀할 것 같다. 무엇보다 비는 오지만 천둥, 번개 없이 고요하다. 사실 케이블카를 타기 전, 이런 날에 산 정상에 있으면 벼락 맞는 거 아니냐고 엄청 걱정했었는데 다행히 그 정도로 운이 없지는 않아서 무사히 살아 돌아왔다.
항상 해외여행을 입에 달고 사느라 사실 국내여행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 본 적이 많지 않다. 해외여행과 또 다른 해외여행 사이에 공백이 생겼을 때나, 갑작스럽게 어딘가 다녀오고 싶을 때 말곤 국내의 어딘가를 찾아서 떠나볼 생각을 잘 안 했다. 그 배경엔 해외여행이 주는 어마어마한 자극에 비해서 익숙한 국내여행이 주는 자극은 상대적으로 볼품없게 느껴졌고 무엇보다 너무 편해서 오히려 싫었다. 복잡한 과정 속에서 느껴지는 묘한 긴장감, 불편함이 주는 새로움이 사라진 여행은 해도 해도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코로나 시대를 1년 넘게 살다 보니 이제 조금 입맛에 맞는 여행을 계획하고 그동안 해외만 바라보느라 놓쳤던 생각보다 꽤 멋진 국내의 풍경들을 찾아 떠날 흥미가 생긴 것 같다. 이러한 전환에는 싱가포르인 친구 A의 말도 큰 영향을 끼쳤는데, 작년 말쯤 코로나 때문에 한국에만 있기 힘들다며 투정을 부렸더니 싱가포르는 서울보다 작다며 본인은 정말 미쳐버릴 것 같다는 말에 우리나라의 '크기'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됐다.


처음부터 끝까지 차로만 움직였던 여행은 처음이었던 거 같다. 운동은 싫어해도 걷는 건 무척 좋아해서 여행할 때는 하루 종일 걸어 다니는 편이다. 뚜벅이라서 생기는 제약(걸어서 가기엔 무리가 있는 곳, 대중교통이 있어도 배차간격이 엉망인 곳은 포기해야 한다는 점) 때문에 차를 타고 여행을 하기엔 생각보다 큰 기회비용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길 가다가 보이는 풍경이 생각보다 마음에 들어도 차를 세우긴 어렵고 어딜 찾아가든 주차공간이 제일 우선순위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아마 면허와 차가 생기더라도 뚜벅이 여행을 포기하진 않을 것 같다. 글을 쓰는 지금, 머릿속이 다시 새로운 여행에 대한 기대로 차오르기 시작한다. 조만간 뚜벅이 여행을 계획해야겠다(시험 끝나는 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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